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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2011 8월 23일 24일 대천 여행( 무량사, 성주사지,궁남지)

2011 8월 23일 24일 대천 여행(  무량사, 성주사지,궁남지)

 23일 수원역에서 9시30분에 만나서 10시에 화성휴게소에서 서울서 내려온 팀과 민나 일정 의논함. 대천으로 나가 성주사지는 지나치고 무량사로 간후 오면서 성주사지를 보고 숙소로 오기로함. 희수샘 차가 네비게이션이 없어 일단 미경샘차를 뒤따르기로 했고  내가 지난번 가족과 함게 간 코스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 희수샘 차에 동승함.

점심을 무량사가서 먹으려했는데 예상밖에 차가 많이 밀린탓에 대천IC를 빠져나와 미경샘차를  뒤따르다가 무량사가는 국도변의 휴게소에서 먹었다.. 희수샘과 난 된장찌개 나머지샘들은 메기매운탕.

 무량사는 사람들이 많지않고 고즈녁하여 좋았다. 지난번 가족과 온 날은 엄청나게 비가 쏟아져서 우산을 들고 다니면서 힘들게 보았는데 오늘은 천천히 둘러보니 더욱 좋았다.

 

     무량사는 부여가 내세우는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여섯 개의 보물이 있다. 산중 넓은 분지에 세운 무량사는 일년 내내 만수산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세속을 털어버리고 들어서는 일주문 기둥은 원목을 생긴 그대로 세웠다

 

 

 

     

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니 보물 제 185호인 오층석탑, 보물 제 233호인 석등, 보물 제 356호인 극락전과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인다.

 천왕문의 사각 프레임에서 석탑과 석등, 극락전까지 일직선인 무량사의 가람배치를 담는게 가장 예쁘다고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것이 생각나서 한컷!! 정말 예쁘네.

 

 

 

느티나무 앞에서 좀 더 가까이 찍은 일직선 가람배치의 석등, 석탑과 극락전이다. 가지가 하늘을 가렸지만, 사찰에선 보기 드문 2층의 극락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청이 고색창연한 단청에서 오래된것에서 오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산전에 있는 무량사의 간판스타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보물 제 1497호)이다

극락전 뒤편 개울가에 위치한 청한당은 선방으로도 쓰고 손님방으로도 사용하는 아담한 집이다. 김시습의 호가 본래 청한자인데 슬쩍 바꾸어서 청한당이라 이름 붙였고, 한가할 한(閒)자를 뒤집어 써서 한가한 경지를 넘어 드러누운 형상으로 쓴 것으로 서예가의 유머가 넘친다. 세종 17년(1435년)에 태어난 김시습은 세살부터 시를 지었고 천재라고 소문이 났다. 세종은 정말 신동인지 알아보라고 승지를 보냈고, 다섯 살 김시습을 무릎에 앉히고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겠느냐?' 물었더니, 김시습이 답하기를

"올 때는 강보에 싸인 김시습이지요(來時襁褓金時習)"

라고 하였다. 세종대왕은 이 대답을 전해 듣고 역시 천재라며, 직접 보고 싶으나 군주가 어린아이를 직접 시험한 예가 없다며,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정성껏 키우라. 성장한 뒤 크게 쓰리라" 하며 비단도포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오세(五歲 )라는 별호를 얻었다고 한다. 자기 자식은 다 천재로 착각하는 오늘의 부모들은, 재주를 드러내지 말고 정성껏 키우라 일렀던 세종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될 것 같다.

 

 

만수산 계곡 물이 청한당 앞으로 흐른다. 이번 여름은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제법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작은 계곡에서 손을 씻으며 김시습이 이곳에서 속세의 모든것을 씻어 보냈을까 생각해본다.

 

 

다시 무량사를 나와  첫번재 다리에서 우회전하여 심시습의 부도를 보러갔다.

부도 뒤에 소나무가 운치 있었고, 오세 김시습의 묘라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보령시소재의 페사지 성주사지로 향하였다. 

 

 

 최치원이 왜 최고의 문장가인가를 잘 보여주는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국보 제 8호).

 최치원이 글을 짓고 사촌동생 최인곤이 썼다고 한다.

  겉은 까만 대리석이지만 속은 흰빛이라 가는 정을 대고 글자를 새기면 글자가 하얗게 보인다. 비석을 이고 있는 돌거북~

 

 

  5층 석탑(보물 제 19호)  전면에 서있는 탑 아쉽게도 석등이 안나왔다.

 

 

성주사터 뒤쪽에서 바라본 삼층석탑과 앞산 모습~

 5층 석탑 탑 뒤로 나란히 선 세 쌍둥이 삼층 석탑, 두개는 보물로 지정되고 하나는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동탑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중앙 3층 석탑(보물 제 20호), 서3층 석탑(보물 제 47호) 동 3층 석탑(도유형문화재 제 26호),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 신앙 때문에 코가 완전히 닳아진 석불입상(문화재자료 제 373호) 시멘트로 얼굴과 몸통을 성형해 놓았는데, 황량한 벌판에 외로이 서 있는 석불입상을 보니 쓸쓸하다.

 

2011년 8월 24일 궁남지

아침은 김치와 김, 참치통조림, 장조림캔으로 간단히하고 10시에 숙소를 나왔다.

사실 24일 일정은 생각하지못하고 떠난여행이었다. 모여서 의논하지뭐...하면서

희수샘이 지난주에 친구들과 부여 궁남지를 다녀왔는데 연곷들이 아주 예쁘다고하여 우리 모두는 궁남지를 보기로하였다. 그 전에 보령 8경중 하나인 어디 바닷가를 잠간 들렸다가 궁남지로 향했는데 미경샘차를 놓치는바람에 우린 부여방면 이정표를 보면서 가다가 삼거리나 사거리에 이정표가 없으면 차세워놓고 물어보고, 나중에 지도를 찾아가며 갔는데 궁남지 도착은 우리가 먼저했다. 인간네비가 이겼네라면서 깔갈갈....연꽃들이 거의 져가고잇었으나 풍광이 아름다왔다. 정림사지탑근처가지 갔다가 거길 보고가면 점심도 먹어야하는데 서울 올라가는 시간이 촉박하여 선거에 지장있다는 몇몇 샘들때문에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멀리서 바라만봤다는 사실   우우 이런 민주시민들이 어디있나. 뭐 결국 투표시간 마감은 8시였는데 6시니 7시니하면서..... 천안삼거리 휴게소에 들러 호도과자 한봉지식 사고 서로 헤어지면서 우리 팀은 천천히 수원으로 왔다. 희수샘이 우리 집앞까지 데려다주는 수고까지 해서 너무 고마웠다. 힘들었을거야 희수샘 고마워용.